[책리뷰] 수레바퀴 아래서
애증의 헤세. 헤르만 헤세의 작품들은 읽고 나면 나 자신의 좋은 면들과 감추고 싶은 부분들을 동시에 거울처럼 비추어 씁쓸한 웃음을 짓게 한다. 읽는 내내 데미안과 비슷하다는 느낌을 너무 많이 받았다. 평생을 공부에 전념하고, 신학교에 들어간 한스에게 솔직하고 새로운 감정과 경험을 안겨주는 존재들, 이런 데자뷰가 있나. 많은 해설들은 한스의 자기주도적이지 못한 삶을 조명하고 있지만, 그보다 '일탈'에 초점을 맞추고 싶다.
일탈의 범위는 어디까지인가. 최근 유튜브에서 자우림의 '일탈'이라는 노래가 처음에 방송 금지곡으로 판정받았다는 것을 보았다. '... 할일이 쌓였을때 훌쩍 여행을, 아파트 옥상에서 번지 점프를, 신도림 역안에서 스트립쇼를...' 노래 가사의 일부이다. 하지만 이 곡은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았고, 자우림은 이에 "누구나 일탈을 원하기 마련"이라고 이야기했다. 일탈의 정의는 정해진 범위나 목적에서 벗어나는 것으로, 사람마다 본인의 페이스가 있기에 일상의 범위를 시간이나 법의 영역 등으로 객관화할 수 없다. 아마 나의 첫 일탈은 학창시절 수업시간이 너무 지루할 때, 생리 결석을 쓰고 보건실 침대에 누워있던 경험이었을 것이다. 지금의 일탈들은 더 크고 과감해져왔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도둑질이 늘듯 용인되는 범위가 커지지만은 않는다. 그것을 다시 돌려놓을 수 있는 마음가짐과 능력에 따라 선은 오르내린다.
규칙적이고 안정적인 삶과 루틴은 안주하기 편하지만, 그렇기에 새롭고 때론 위험한 것들에 대한 유혹은 마다하기 어렵다. 그러한 유혹을 금지하고 억압하는 것이 답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물론 똥인지 된장인지 먹어봐야 아느냐는 말도 있지만, 머리로 알아도 마음이 그렇게 하지 못하게 하는 상황들은 한스에게서도 찾을 수 있다. 하일러에 대한 존경과 사랑도 처음에는 새롭고 두려웠지만, 하일러를 바이러스 같이 취급하는 학교의 대처는 그 마음을 더 크게 만들기도 하였다. 일탈을 경험하는 것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는 힘을 준다. 무엇인지 알았을 때 그것을 다루는 방법을 배우고, 그 도중에 마음과 몸이 다칠 수 있지만 한 단계 더 나아가는 게 청춘으로써 할 수 있는 일이 아닐까 싶다. 나중에 돌아봤을 때 웃어넘길 수 있는 정도의 추억으로 말이다.
매우 딴 얘기를 하고 있는 것 같지만, 다시 책으로 돌아와서 한스의 안타까운 마지막은 모두 보호와 자유의 경계를 알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동안 해보지 못한 것들에 대한 욕망이 커진 것도 맞지만, 그것을 제대로 다루는 힘, 즉 본인의 안전지대를 벗어나 보지 못한 것이 위태로운 마음 상태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억압은 사람들의 공포심을 이용해 보호를 작용하게 하지만, 동시에 궁금증을 더하며 역효과를 낼 수 있다. 일탈을 장려한다기보단, 무언가를 잃어보고 넘어져보고 다쳐보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그것으로 더 큰 것을 배워보는 것은 어떤가 제안하고싶다.
물론 10년 후의 나는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다.